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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의 지역 원주민들 

멕시코

남아메리카 국가들 

원주민의 유래

원주민의 역사와 문화 

원주민(native) 의 유래 

원주민들은 어디에서 왔는가? 대부분의 학자들은 제일 먼저 아메리카 땅에 건너 온 종족은

아시아로부터 베링 해협을 건너와 오늘날 아메리카 인디언의 조상이 되었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다.

사실 인간이 먼 거리를 이주할 때에는 지리와 기후 등의 조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자연환경이 이동을 불가능하게 할 정도의 조건이라면 원거리 이주가 발생하지 않는다.

원주민들이 신대륙에 올 수 있었던 것도 베링 해협이라는 통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배가 발명되기 전, 원주민들은 마른 땅을 건널 수밖에 없었다. 대략 B.C. 25,000년에서 9,000년 사이에는

동북아시아와 알래스카가 넓은 평원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

"위스콘신" 이라고 불리는 제 4 빙하기에는 지금보다 해면이 훨씬 낮았고 물은 얼음 아래 잠겨 있었다.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캐나다와 미국의 북부 지방은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지 않고

넓은 평원으로 아시아 대륙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때가 대략 B.C. 25,000년경이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쉽게 알래스카에 도달할 수 있었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원주민들이 베링 해협을 통해 남·북미로 이주해 간 경위를 살펴보자.

언어, 혈액형, 현존하는 고대 원주민들의 치아(齒牙)형태 등을 연구한 결과,

세 부류의 이주자들이 아시아로부터 이주해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이들을 열거하면,

그 첫 번째로 현재의 시베리아 레나 강 계곡의 "아메린드" 혹은 "알곤컨"이 1만 5천 년 전 가장 먼저 이주했다.

두 번째로 6천 년 전 현재의 시베리아 알단 강 유역의 "아타바스칸" 혹은 "나-데네"가 이주하였으며,

마지막으로 4천 년 전 소련과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걸터앉아 있는

"아무르" 강 분지의 "에스티모 알륫"이 이주하였다.

이 세 무리들은 시간적 순서대로 이주했기 때문에 먼저 건너간 사람들은 남미(南美)까지 내려가게 되었고

늦게 온 이들은 북쪽에 머물게 되었다.

원주민의 언어/부족들 

원주민의 언어 / 부족들

원주민의 뿌리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언어(言語)를 연구한 그린버그 교수는 2백 개가 넘는 그들의 언어들을 세 가지 부류로 분류하였다.

그 중 "아메린드"가 가장 큰 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가장 넓은 지역에 펴져 있었고 또 가장 오래된 언어였다.

그리고 "아타바스칸" 혹은 "나-데네"는 캐나다와 북캘리포니아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는데, "아파치"나 "나바호"같은 부족이 이 "나-데네"를 사용해왔다.

마지막으로 에스키모-알륫어는 북아시아 언어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다고 하였다.

 

원주민의 유래와 그들의 신세계 이주에 관하여, 언어 인류학자인 그린버그 교수와 인종학자인 제구라 교수 및 인류학자인 터너 교수는

서로의 연구결과를 놓고 종합적인 토론을 진행했다. 그 결과, 원주민의 언어가 종래 생각했던 것처럼 2백 혹은 3백 개 정도는 아니며

크게 세 개의 언어군으로 축소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그린버그 교수는 이러한 연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가장 넓게 사용된 언어가 알고퀸이고, 다음으로는 아타바스칸과 나-데네이며,

세 번째가 에스키모-알륫이라고 말했다.

 

제구라 교수는 인디언의 혈액형을 A, O, B, Rh형으로 분류하였는데, 그 역시 원주민을 크게 나누면 세 부족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또 그는 그린버그가 나눈 세 부족에 자기의 혈액형 연구결과를 맞추어 배정할 수 있다는, 매우 놀라운 발견을 해냈다.

나아가 그는 언어의 분포도 역시 위의 세 지역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제구라 교수는 그린버그 교수의 공동 연구결과는 같은 문제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연구한 결과가 동일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터너 교수는 치아 형태를 분석하여 원주민의 유래를 추적하였다.

그는 먼저 원주민들의 어금니 수를 검토하였다.

예를 들면 어금니 뿌리가 두 대인 유럽인들에 비해 어금니의 뿌리가 세 개이면 아시아인 아니면 원주민들인 것이다.

그래서 치아의 형태는 인종의 유래를 탐구하는 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터너 교수는 직접 시베리아와 중국에 다녀왔는데, 그는 거기에서 8,000년 내지 2,000년 전 살았던 인간의 이빨들을 조사하였다.

이 이빨들은 시베리아와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러한 터너 교수의 연구결과 또한 제구라의 혈액형에 의한 분류 및 그린버그의 언어에 대한 분류와 일치하였다.

 

요컨대 세 학자들은 원주민의 유래에 대한 공통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원주민들의 세 부족은 같은 시기에 이주한 것이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3단계에 걸쳐 각기 이주해왔다는 결론으로,

이는 현재까지 원주민의 기원과 유래에 관한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원주민의 생활

원주민의 생활 

아메리카 대륙에 처음 살고 있었던 사람들은 원주민들이었다.

그들은 동반구에서 서반구로 넘어와 정착하였는데, 그들이 건설했던 지역들은 오늘날 현대적 도시들로 변모하였다.

원주민들이 사용했던 언어는 오늘날 많은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데

미국의 27개 주의 이름, 그리고 수많은 도시, 마을, 강, 호수의 이름들은 바로 아메리카 원주민의 언어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그들은 사슴과 들소를 비롯한 짐승들을 사냥했고 땅을 경작하여 농사를 지었다.

세계 최초로 감자와 토마토를 재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세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데 유용한 많은 작물들을 재배하였다.

또한 최초로 칠면조를 사육했으며, 유용한 식물들, 즉 고무, 담배, 설탕, 단풍잎, 키니네를 뽑는 기나수의 효용 가치를 발견하였다.

광대한 아메리카 대륙은 다양한 기후와 땅을 갖고 있어 각 지역마다 특색 있는 식물과 동물, 그리고 자연 물질들을 공급해주었다.

그래서 지역에 따라 원주민들은 서로 다른 음식 및 의복, 주거 형태를 갖고 각기 다른 생활양식에 따라 살아왔다.

특히 그들은 자연에 의존하고 자연으로부터 배우며 살았다. 자연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과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계절과 날씨의 변화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해했다.

그리고 기후와 관련된 태양, 비, 바람을 숭배했다. 의식이나 기도에 있어서 그들은 이런 신들의 도움을 얻고자 했다.

원주민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환경에 적절히 적응하며 살았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기 이전만 해도 원주민들은 거의 300개에 달하는 별개의 언어를 가진 부족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하고 식민지화함으로써 많은 원주민 언어가 사라졌고, 남아 있는 어군(語群)도 모두 사라졌다.

북미에서도 이미 원주민 언어의 1/3이 소멸되었고, 현재는 원주민 언어의 50% 이상이 극히 소수의 원주민들에 의해서 쓰이고 있다.

원주민의 세계관

원주민의 세계관

원주민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가진 세계관의 몇 가지 공통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생명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둘째, 보이지 않는 영적인 힘이 있어 모든 존재하는 것들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셋째, 세상의 모든 것들은 끊임없이 윤회하며 변화한다. 

넷째, 인간은 자연의 일부로서 그것을 지배하거나 소유하기 보다는 더불어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가야 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타인들, 동물, 새, 식물, 심지어 생명이 없는 것들까지도 도와주고

공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사실 청교도들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앙의 지유를 찾아서 북미에 왔을 때 원주민들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실은 바로 이런 세계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 <표>에서 보듯이 원주민들은 공동체 생활을 중시하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하지 않도록 교육을 받으며 어떤 일을 하기 앞서 다른 사람들, 특히 나이 든 어른들과 문제를 논의하도록 가르침을 받는다. 

이에 반해서 북미인들은 경쟁에 높은 가치를 둔다. 학생들은 성적으로 경쟁하고 영웅 정신은 스포츠에서 승리를 가져온다고 배운다. 

원주민들은 경쟁을 싫어하고, 서로 협력하는 것을 좋아하는데, 서부 개척시대의 영화를 보면

원주민들은 하나같이 백인들을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나쁜 사람들로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가치관의 관점에서 볼 때 실제보다 과장되었거나 왜곡된 형태로 잘못 묘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주민 사회 가족 및 여성

원주민 사회의 가족 및 여성

미국 원주민(Native American) 사회의 경우 가족의 경제구조 측면에서는 가족관계보다 오히려 친척관계가 더 중요시되었다.

또 사유재산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협동이나 상호성에 의한 사회운영 원리를 가지고 있었다.

노동에 있어 남성과 여성은 뚜렷한 분업을 하였으며, 여성들은 모계사회를 형성하여 경제적 또는 정치적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결혼은 대부분 개인의 선택에 의해 행해졌고,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혼이 가능하였다.

특히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던 이뤄쿼이(Iroquois) 부족의 경우에는 결혼 후 낳고자 하는 자녀의 수도 여성이 결정했고,

이혼에 있어서도 여성의 결정권이 상당히 높았다.

 

이혼은 아내가 남편의 물건들을 밖으로 내던짐으로써 이혼이 성사되었으며, 남편의 부재 시에도 종종 이혼이 성사되었다.

유럽의 풍습과는 반대로 이혼 후 자녀양육권은 대부분 여성에게 있었다.

어른들은 혈연관계의 자녀들뿐만 아니라 부족의 모든 어린아이들을 공동으로 양육해야 하는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성에 대한 생각은 종종 정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당시 유럽인들이 지녔던 부정적인 죄의식 같은 것은 없었다.

많은 부족에서는 일부다처 또는 혼전 성관계가 허용되었고, 어린이들의 성적 유희 등이 자유롭게 행해졌다.

대부분의 원주민들은 결혼 후 간통에 대한 제재를 받지 않는 대신 쉽게 헤어질 수 있었고, 새롭게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매우 용이했다.

반면 동부의 부족들에게 강간은 절대로 용서되지 않는 중죄에 해당되었다.

 

프에블로(pueblo) 부족 여성들에게는 성이라는 것이 매우 상징적인 의미였는데, 남녀 간에 성관계를 맺는 것과 남녀가 나체로 지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프에블로족 여성들은 성에 대해 매우 솔직한 태도를 지니고 있었고,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의 식생활을 해결하고 성생활을 즐기는 것이었다.

프에블로족 여성들은 부부간의 성생활을 통해서 출산을 하고, 그들이 출산한 아이들이 성장해 노동력을 제공함으로써 존경받을 수 있었으며,

야생마와 같은 남편들을 길들일 수도 있었다. 이들은 자연현상의 변화나 지역의 이름도 '성'에 비유해서 해석하였는데,

'클리토리스의 샘' '소녀의 젖꼭지' 또는 '남근삽입' 등의 용어들이 지역의 명칭으로 사용된 예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원주민의 놀이

원주민의 놀이

흔히들 인간을 놀이의 동물이라고 하고 이 놀이에서 출발하여 문명을 창조해 왔다고도 하는데,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장난감의 연장(延長)이 바로 인류의 문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인디언 부족들의 놀이를 살펴보면 그들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인디언 부족들이 일상생활에서 가장 많이 하는 놀이 가운데는 실뜨기, 고누, 윷놀이 등이 있는데

이것들이 그 형태나 방법에 있어서 우리 민족의 놀이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데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맥팔랜 같은 학자들은 이런 놀이가 중국에서 건너 왔을 것이라고 추측하지만,

모든 서양 학자들이 한국의 것을 중국의 것이라고 혼돈하고 있듯이 이에 대해서도 혼돈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윷놀이, 싱뜨기, 고누 같은 놀이는 우리나라 어느 지방에 가도 흔히 있는 놀이이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놀이를 즐겨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한국에서 유래하였음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사실이다.

 

이 가운데서도 실뜨기 놀이는 실을 양 손에 걸고 이리저리 여러 가지 모양으로 뜨는 것인데

이는 일본, 필리핀, 오스트레일리아, 뉴기니 등 세계 전역에 널리 펴져 있는 놀이이다.

인디언들의 이 실뜨기 놀이는 백인들이 미국 땅에 들어오기 훨씬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그들은 이 놀이에는 어떤 마술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또 실뜨기 놀이를 손뿐만 아니라 발가락, 이빨 입술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 없이 혼자서 하기도 하는데,

놀라울 정도로 한국인들이 하는 것과 꼭 같다.

 

윷놀이의 경우 그들은 이것을 경마 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놀이에서 그들은 우리의 윷판 같은 둥근 판을 만들어 놓고 윷 길이만한 막대기를 던져서 그 엎어지는 모양에 따라서 윷말을 움직이는데,

막대기 수는 세 개로써 우리의 네 개와 다르다.

그러나 윷판 위에 말이 가는 방법과 상대방의 말과 겹쳐질 때 잡을 수 있는 규칙 등은 우리의 윷놀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밖에도 우리 나라 각 지방에 널리 퍼져 있는 고누(꼬누 혹은 꼰) 등의 많은 놀이들이 우리와 너무나 비슷하다.

맥팔랜 교수는 그의 저서에서 150여 가지의 인디언 놀이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것들 중에는 한국의 민속놀이와 비슷한 것이 허다하여 그들과 우리가 한 뿌리임을 입증해주고 있다.

또 미주에 산재해 있는 아파치족들의 생활과 풍습들도 우리와 매우 흡사할 뿐 아니라,

아파치라는 호칭 그 자체가 우리의 '아버지'라는 말이기도 하다.

원주민의 정치와 종교

원주민의 정치와 종교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원주민 사회의 정치 형태는 추장을 중심으로 하는 부족사회가 아니다.

부족마다 체제는 다르지만, 기본적으로는 사회의 연장자나 능력이 알려진 젊은이들이 포함된 회의를 열어

만장일치 혹은 다수결의 결과로서 부족의 결정이 내려졌다. 추장이란 이들이 회의 결과 뽑은 공무원을 지칭하는 단어였을 뿐,

원주민 사회는 1명이 다스리는 군주 체제가 아닌 직접민주정치의 형태였다.

수렵을 했던 원주민의 경우가 이러한 정치 시스템을 주로 취했다.

 

반면 마야나 아즈텍 같이 농경이 고도로 발달했던 지역에선 봉건제와 흡사한 피라미드식 계급제도 형태를 보이기도 했다.

또 잉카에서는 황제를 위시로 한 중앙집권 정치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황제의 권위는 살아있는 신과도 같았다.

중국에서 황제가 받은 대우보다 훨씬 더 높았고, 이집트의 파라오와 비슷한 수준의 권력을 누렸다. 잉카는 사실상 신정국가였다.

 

추장은 주로 전투추장과 수렵추장, 제식추장으로 나뉘어졌다. 물론 평화추장이나 농경추장 같은 것도 있었다.

유명한 전투추장으로는 타탕카 이요타케(앉아있는 소)가 있다.

제식추장은 종교적 역할을 담당했고 ‘위차샤 와칸(wichasha wakan)’이라 불리며

원주민 사회의 종교생활을 이끌었다. 위차샤는 수우족 언어로 '남자', 와칸은 이해할 수 없는 '신성한 권능'을 의미한다.

 

수우족이 믿는 위대한 정령 와칸탕카에도 들어가는 말이다. 위차샤 와칸은 태양춤을 춰 예언하는 역할을 맡았다.

태양춤은 제식 기간 동안 외부 부족과 접촉하지 않고 미리 축적해 놓은 식량을 사용하며 4일 동안 축제를 즐긴 후,

위차샤 와칸이 축제 마지막에 무리의 한가운데로 들어오며 시작한다. 무리는 둥그렇게 원을 형성하여 와칸의 태양춤을 보게 된다.

태양춤은 축제 기간 내내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아 매우 몽롱해진 위차샤 와칸이 담배나 마약류를 섭취하여

혼미한 상황에서 창으로 자신을 찔러 피가 몸을 적신 상황에서 창을 가운데 꽂고 그 주변을 춤을 추며 도는 의식이다.

피를 뒤집어쓰는 부분은 부족별로 차이는 있지만 초원 지방의 수우족은 창을 사용했다.

아예 피를 보지 않고 춤을 추는 부족도 있다.

극한의 육체 상황에서 위차샤 와칸은 환각을 보게 되고, 보지 않더라도 의식이 끝난 후 첫 잠자리에서 꿈으로 계시를 받게 된다.

이 계시는 상당히 중요한 메시지로 부족 구성원들에게 전달되었다.

1889년 위차샤 와칸인 워보카가 창시한 2차 유령춤 운동 역시 위차샤 와칸이 차지하고 있는 지위를 잘 보여준다.

유령춤은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안정을 기원하는 춤으로, 유령춤 운동에 있어 역사적으로 기억할 위차샤 와칸에는 워보카가 있다.

 

한편 아메리카의 여러 원주민들은 특유의 자연철학적 사상을 깊이 있게 발달시켰다.

유명한 아메리칸 원주민 사상-철학 관련 저서들 중, '시튼 동물기' 로 유명한 어니스트 톰슨 시튼 역시

원주민 사상에 관련된 저서를 남겼고 자신 역시 원주민들과 많은 교류를 하였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유럽인들이 들여온 담배도 재배했는데, 특이한 것은 담배를 일종의 종교적인 용도로 활용했다는 사실이다.

원주민들은 담뱃잎에 약재를 싼 후 그것을 태운 연기를 들이마셨으며 그로써 몸을 정화한다고 믿었다.

원주민의 관점에서 이해한다면 담배는 오늘날 일반적으로 인식되는 것처럼

만악의 근원이 아니라 고유의 종교적 의식에 불가결한 것이었다.

원주민의 종교와 무속(巫俗)

원주민의 종교와 무속

원주민의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동네 어구에 있는 우리의 장승같은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의 장승들은 토템 숭배에서 연유한 것인데 거기에 등장하는 동물로는 곰, 까마귀, 여우, 독수리, 비버, 산양, 상어, 고래 같은 것들이 있다.

그들은 동이족(東夷族)에서와 같이 까마귀를 대단한 영물로 취급하는데 태초(太初)에 까마귀가 인간과 만물을 만들었다고 믿고 있다.

알래스카 웨일즈 섬에는 여러 대의 장승 기둥이 서 있는데 그 중에는 사람의 어깨 위에 까마귀를 얹고 있는 것도 있다.

원주민 토템 가운데서도 가장 흔한 것이 곰인데 트링기트 원주민들은 곰을 가장 숭배하며 절대로 곰을 잡아먹지 않는다.

그 이유는 곰이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다(Haida) 원주민들은 지금도 그들이 곰 어머니로부터 내려온 후손들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또 알래스카 연해의 원주민들은 회색 곰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신봉하고 있으며 곰 어머니에 관한 재미있는 신화(神話)를 가지고 있다.

이런 곰 숭배사상은 우리의 단군설화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원주민들의 창조신앙 속에 가장 많은 신화소(神話素)는 물과 어머니 신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푸에블로" 원주민들의 최고신인 주니 신은 남녀의 양성(兩性)을 모두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신이란 남녀의 양성을 다 초월해서 존재한다는 그들의 종교관을 보여준다.

 

케레스 원주민들은 "생각하는 여인"이라는 "수시수티나코" 여신을 창조신으로 모시는데, 이 여신은 지하에서 살고 있다.

또 호피 원주민들은 "단단한 존재의 여인" 후루잉 우티를 창조신으로 모시는데,

이 여신은 땅 자체이고 해나 별과 같이 살고 있으며 그의 아들이 바로 땅의 곡식의 신이라고 믿고 있다.

오랜 옛날에 이 세상에는 물 밖에 없었는데 후루잉 우티는 매우 작은 땅 탈라쇼모라는 산봉우리에서 살았다.

그 여신은 달, 별과 석탄, 조개구슬 같은 단단한 물건들을 소유하고 있었다.

아라파호 원주민의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창조신화에는 「태초에는 이 땅이 온통 물에 덮여 있었는데 큰 신령님이 거북에게 명하여 바다 밑으로 내려가서 진흙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러나 거북은 바다 밑까지 도달할 수가 없었다.

다음에는 비버(海狸)에게 명하여 진흙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비버는 성공적으로 진흙을 가져올 수 있었다.

큰 신령님은 이 진흙을 사방에 던져 흩뜨렸는데 이것이 바로 우주가 되었다」는 이야기에 전해오고 있다.

이상이 원주민들의 창조신화들인데, 다른 한편 원주민의 부족 가운데는 또 최고신을 신봉하는 부족들도 있다.

조지아 해협 부근에 살고 있는 콰티크트, 누트카, 벨라, 쿠라 같은 부족들은 `칼스'라는 신을

최고의 주재 신으로 신봉하는데 이 칼스라는 말은 `위에 계신 분'이란 뜻이다.

이보다 좀 낮은 지위에 있는 신들은 이 칼스 신에게 종속되어 그에게 봉사한다는 단일 신관(神觀)이다.

또 나바호 원주민들의 우주관은 모든 사물이 인격화되어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그들은 모든 사물에 인격성이 부여되어 있다고 믿는다.

나바호 언어가 자동사를 써서 표현하는 것보다는 타동사를 쓰기를 더 선호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원주민들의 신앙 가운데서도 가장 보편적으로 퍼져 있는 것이 샤머니즘이라 할 수 있다.

원주민들은 인간이 정령들과 직접 교접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이러한 교접은 후손들에게 전승되어 내려간다고 믿었다.

즉, 어떤 부모가 병을 고치는 샤먼을 행했다면 그 샤먼이 그 부모의 자식들에게까지 대대로 전해진다는 말이다.

어떤 샤먼은 질병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같은 중요한 사건들도 결정한다. 그리고 샤먼들은 '이크투샤'란 말을 할 때마다 부들부들 몸을 떤다.

이러한 입신정령(入神精靈) 숭배사상은

그들의 언어를 분석해 보면 사물(事物)의 영(靈)은 나보다 높은 것이지만 사물 그 자체는 사람보다 낮다는 개념들을 엿볼 수 있다.

 

「오랜 옛날에, 사냥꾼들이 신령한 산양(山羊)들을 죽인 죄로 살해당하고 말았는데, 살아남은 사냥꾼들이 스키나 강으로 돌아왔다.

어느 날 강에서 낚시를 하고 있을 때. 큰 회색 곰이 나타나 어부의 통나무 뗏목을 모두 부숴 버렸는데 그 곰이 창에 맞아 죽는다.

어부는 이 동물이 곰이라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 곰은 사람의 얼굴과 사람의 머리털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데

어리석게도 그 어부는 곰의 머리카락을 잘라버린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물의 신들이 크게 노하여 땅과 산까지 물로 채워 홍수를 일으킨다.」

 

원주민의 신화에 나오는 이 이야기에는 곰과 함께 고래도 숭배의 대상으로 등장한다.

원주민들의 곰 숭배 신앙은 아시아 일대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여겨진다.

곰과 고래가 함께 등장하는 신앙은 아시아 대륙의 곰 숭배신앙이 베링 해협 근처의 고래 신앙과 접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결과로 볼 수 있다.

캘리포니아의 원주민 가운데는 곰 의사가 있었는데 그들은 수호신으로서 곰을 숭배하는 의사들이었다.

이 곰 의사들은 북과 방울을 사용했는데 정령(精靈)을 부를 때에는 북을 치고 방울을 흔든다.

마치 우리나라의 무당과도 흡사하다. 북미주의 원주민들은 주로 북을 사용하고 방울은 남북 미주 원주민들이 모두 사용한다.

곰 숭배 예배의식은 어느 지역에서나 유사성이 있고, 매우 넓은 지역에 퍼져 있다. 곰의 정령을 받게 되면

남자는 활을 잘 쏘게 되어 사냥에 능해지며 여자인 경우는 좋은 어머니가 되어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며 부지런해진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콜럼버스와 원주민 대학살

콜럼버스와 원주민 대학살

원주민의 역사는 콜럼버스와 함께 완전히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492년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지원으로 황금을 찾아 90명이 나눠 탄 작은 배 세 척을 거느리고 첫 항해길에 오른 콜럼버스는

이후 카리브해의 서인도 제도에 상륙한다.

당시 서인도 제도의 아이티 섬에 사는 인디언들은 남녀를 불문하고 모두 벌거숭이로 돌아다녔는데 백인들이 칼을 빼 들고 나타나자

백마를 본 일 마냥 신기한 듯 달려와 음식과 물, 돌창 등을 가져다주며 어떤 심부름도 서슴지 않고 들어주는 등 환대를 했다고 전해진다.

인디언들에게 철제무기는 난생 처음이었기 때문에 어떤 인디언들은 칼날을 만져보다 손가락을 베이기도 했다.

1차 탐험을 마친 콜럼버스는 대원 중 39명을 아이티 섬에 남겨 놓고 스페인으로 귀국한다.

스페인에 돌아간 그는 이사벨 여왕에게 2차 항해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금과 노예들을 데려올 수 있다고 말한다.

콜럼버스의 설득은 통했고 그는 1차 항해보다 훨씬 큰 규모인 배 17척과 선원 1,200명의 탐험대를 꾸려 2차 항해에 오를 수 있었다.

이후 콜럼버스는 대규모 노예생포 작전을 펼쳐나갔다. 당시의 참상은 Bartolome Las Casas라는 신부의 증언을 통해 알 수 있다.

Bartolome Las Casas 신부 또한 처음에는 인디언들을 이용해 농장을 경영했지만 끔찍한 인디언들의 참상을 본 후

'인도제도의 유린 (The Devastation of the Indies)‘라는 책을 집필하게 되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증언이 담겨 있다.

 

“콜럼버스는 14세 이상의 인디언들에게 석 달마다 1번씩 일정량의 금을 캐오도록 의무화했다.

할당된 금을 캐오면 구리 토큰을 한 개씩 나눠 주고 목에 걸고 다니도록 했다. 스페인 사람들은 토큰이 없는 인디언들을 보면

손을 잘라 버렸고, 그런 인디언들은 대개 피를 흘리다 죽곤 했다."

 

불행히도 아이티 섬에는 이렇다 할 금광이 없었다. 그래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인디언들은 도망칠 수밖에 없었고 그때마다 대부분 죽임을 당했다.

석기문명을 채 벗어나지 못한 인디언들이 갑옷, 창, 칼, 말, 소총 등으로 무장한 스페인 병사들에게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간혹 저항을 하다 잡히면 불에 타 죽어야 했다.

결국 많은 인디언들이 스페인 사람들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 ‘카사바(cassava)’라는 독을 먹고 자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그 결과 콜럼버스가 아이티 섬에 도착한 2년 동안 원주민 전체 인구 30만 명 가운데 1/3인 무려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508년에는 6만 명밖에 남지 않았고, 1548년에는 불과 5백 명 이하로 떨어졌고, 1650년 이윽고 멸종하고 말았다.

세균과 원주민 대학살

세균과 원주민 대학살

유럽인은 원주민에게는 살아있는 세균병기와 같은 존재였다.

콜럼버스 시절의 유럽 도시는 하수 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상상 이상으로 불결했다. 향수가 유행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게다가 인간의 질병은 대개 가축의 질병에서 비롯된 것이 많은데, 일찍이 아메리카 대륙에는 가축화할 만한 대형 포유류가

이미 소빙하기 때 대부분 멸종했던 터, 때문에 가축과 잠도 함께 자던(혹은 같은 공간에서 자던) 중세 유럽인들은

원주민들에게 그 자체 병원균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전염병이 퍼져서 도시 국가급의 문명마저 붕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한편, 처음엔 우연히 병을 옮기던 백인들은 원주민들의 약한 면역력을 알게 되자 나중에는 고의적으로 병을 퍼뜨려

원주민 인구를 줄이는 악랄한 모습도 보여주었다.

질병 외에도 알코올에 면역력이 없는 원주민들에게 선물인 냥 독한 술을 마구 주었고,

그 결과 술에 대한 위험성을 모르던 많은 수의 원주민들이 알코올 과다섭취로 인한 병으로 죽어갔다.

유럽인들의 학살은 결국 1500년경까지 멕시코 포함 북아메리카에만 총 3000만 이상이었던 원주민의 인구를 한때 140만 명까지 줄여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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